양저우는 물길을 알면 이해하기 쉬운 도시다. 교역과 곡물 운송, 소금 장사가 부를 가져왔고, 그 부는 정원과 서고, 종교 공간으로 이어졌다. 명소를 빠르게 찍고 다니기보다 며칠에 나누어 천천히 걷는 편이 어울린다. 옛 운하와 둥관제, 북쪽의 수강, 창장 강변의 과저우에는 서로 다른 역사의 층이 남아 있다.
둥관 나루에서 시내로
둥관 나루는 성의 동문 밖에 자리해 수운과 시내로 들어가는 길을 연결했다. 성문 주변에는 당, 오대, 송 등 여러 시기의 도시 흔적이 겹쳐 있다. 지금 보이는 문에는 복원된 부분도 있으므로 겉모습만 보고 모든 벽을 당대 유적으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 강변에서 둥관제로 걸어가면 선착장과 상점, 주거지가 어떻게 맞물렸는지 보인다. 운하 옆에는 그저 앉아 쉬거나 산책하며 시간을 보내는 주민들도 있다.
도시의 역사와 인쇄된 한 장의 종이
양저우박물관과 중국목판인쇄박물관은 한 건물을 쓴다. 역사 전시는 초기 한청에서 한대의 광릉, 당대의 번영, 이후 소금 상인들의 시대로 이어진다. 원대의 푸른 유약 바탕에 흰 용을 새긴 매병은 눈여겨볼 유물이다. 인쇄 전시는 다른 방식으로 역사를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글씨를 나무에 옮기고 판을 새긴 뒤 먹과 종이로 한 장을 찍어낸다. 웅장한 건물들을 둘러보는 사이에 이런 세밀한 작업에도 시간을 내볼 만하다.
수강의 위와 아래에 있던 당대 도시
당대 양저우에는 수강 위의 행정 구역과 사람들이 살고 거래하던 아래쪽 시가지가 있었다. 남은 판축 성벽은 완전한 고대 도심을 상상하지 않고도 그 구조를 파악하게 한다. 당성 유적과 옌허각을 출발점으로 삼을 수 있다. 만당 시기 양저우에서 일한 신라 문인 최치원의 기념 공간은 중국과 한반도를 오간 사람과 글의 역사를 전한다. 가까운 관음산에서는 언덕 위 사찰이라는 또 다른 풍경을 만난다.
대명사의 바닷길과 정원, 시문
대명사의 창건은 457~464년으로 거슬러 올라가지만 전각은 여러 차례 다시 지어졌다. 이곳의 중요한 인물은 여섯 번째 시도 끝에 일본에 도착한 감진이다. 량쓰청이 나라의 도쇼다이지에서 영감을 받아 설계한 감진기념당은 1973년에 완공됐다. 오래된 종교 공간 안에 세운 근대의 기념 건축이다.
평산당은 구양수, 곡림당은 소식과 연결된다. 서원과 황제의 비석, 서령탑은 다른 시대의 흔적을 더한다. ‘제오천’이라는 이름에는 차를 끓일 물의 등급을 매기던 전통이 담겨 있다. 사진 한 장으로 방문을 끝내기보다 경내를 걸을 시간을 두자. 개별 전각과 탑의 출입 가능 여부는 현장에서 확인하는 편이 좋다.
서로 구분해야 할 황실의 무덤
수 양제는 618년 강도에서 살해됐다. 19세기에 위치가 비정된 전통적인 뇌당의 무덤은 추모 공간이다. 2013년 양저우 시후 지역에서 발견되어 묘지명으로 고고학적 근거를 얻은 벽돌무덤과는 다른 장소다. 두 곳의 역사와 성격을 혼동하지 말자.
한광릉왕묘박물관은 훨씬 이전의 인물, 한 무제의 아들 유서를 다룬다. 가오유 톈산에서 발굴한 무덤을 수강 근처로 옮겨 전시했다. 목재의 끝을 안쪽으로 향하게 쌓은 정교한 구조는 고위층의 장례 방식인 황장제주를 보여준다. 칠기와 옥기, 목제품을 함께 보면 이 기술이 한대 궁정 문화 속에서 어떤 의미였는지 이해하기 쉽다.
운하 옆에 남은 이슬람의 역사
푸하딩 정원과 묘역에는 13세기 양저우의 이슬람 문화가 남아 있다. 아랍어 비문과 무덤, 중국식 지붕에 뾰족한 아치를 결합한 건축은 옛 운하 풍경에 다른 표정을 더한다. 다른 무슬림 가문들의 묘도 있다. 묘역과 종교 활동 공간에서는 조용히 예의를 갖춰 둘러보자.
선학사 역시 푸하딩과 관련이 있다. 송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역사를 지녔으며 이후 재건을 거쳤다. 중국식 전각이 이슬람 예배 공간으로 쓰인다. 문과 통로, 예배당을 학의 몸에 빗대는 전통적인 해석이 있지만 옛 배치가 모두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아니다. 소금 상인 이야기만으로는 담기지 않는 교역 도시의 사람들을 만나는 곳이다.
먼 곳에서 온 여행자와 1645년의 기억
마르코 폴로 기념 공간과 1987년 베네치아가 선물한 날개 달린 사자상은 또 다른 국제 교류의 흔적이다. 마르코 폴로의 여행기는 양저우와의 관계를 전하지만, 그가 3년 동안 도시를 통치했다는 이야기는 논쟁의 여지가 있다.
사극법 사당은 더 무거운 역사를 마주하는 곳이다. 그는 1645년 양저우를 지키다 함락 후 살해됐고, 뒤이은 학살도 도시의 기억에 남았다. 매화령의 기념 공간에는 의관총과 비문, 매화 정원이 있다. 추모의 장소에 맞는 마음으로 차분히 돌아보자.
개원: 상인의 집과 돌로 표현한 사계절
개원은 소금 상인 황지균을 위해 1818년에 조성됐다. 남쪽 주택과 중앙 정원, 북쪽 대나무 숲이 하나의 공간을 이룬다. 좁은 방화 골목으로 나뉜 전각과 안뜰에서 부유한 가문의 생활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 한학당은 주요 건물 가운데 하나다.
정원의 핵심은 서로 다른 돌과 식물로 봄·여름·가을·겨울을 표현한 가산의 연속이다. 대나무는 정원의 성격뿐 아니라 이름의 모양과도 연결된다. 돌 하나하나보다 방과 액자처럼 보이는 경치, 길의 관계를 함께 보자. 둥관제 근처의 판위량 기념 공간에서는 훗날 프랑스로 활동 무대를 넓힌 화가의 삶도 만날 수 있다.
황제의 서고와 개성을 지킨 화가들
천녕사는 강희제와 건륭제가 남쪽 순행 때 이용한 어마두 근처에 있다. 조인과의 관계, 1780년 『사고전서』를 보관하기 위해 세운 문회각도 이곳 역사의 일부다. 문회각은 19세기의 전란으로 소실됐고 사찰도 파괴와 재건을 겪었다. 현장을 보면 사라진 장서 사업의 규모를 조금 더 실감할 수 있다.
서방사에는 양주팔괴 기념 공간이 있다. 금농이 살았던 곳이며 명대 전각도 남아 있다. 팔괴의 구성원은 설명마다 조금씩 다르지만 정섭, 금농, 나빙 등 개성 있는 수묵 표현을 추구한 화가들이 중심이다. 가까운 사망정은 1559년에 세워진 팔각형 건물로 길이 교차하는 곳 위로 솟아 있다.
서고와 작가의 집, 운하의 탑
오도대부는 오인손을 위해 1888년에 지었다. 양저우와 닝보의 건축 전통에 서양식 요소가 섞여 있다. 닝보 천일각에서 착안한 측해루는 부유한 집이 학문의 중심이 되기도 했음을 보여준다. 주자청 고거에서는 더 가까운 문학의 일상을 만난다. 방과 안뜰을 통해 「배영」의 작가가 고향으로 여긴 도시에서의 삶을 떠올릴 수 있다.
문하로와 문창로 교차점의 문창각은 1585년에 세운 건물로, 옛 유학 교육 시설의 일부가 남은 것이다. 남쪽 운하 옆 문봉탑은 1582년에 건립됐다. 주변에는 감진의 도항과 불교 교류의 기억이 겹치지만, 지금의 탑은 그의 당대 항해보다 훨씬 뒤에 세워졌다.
과저우에서 창장을 바라보며
전장 맞은편의 과저우는 운하와 창장을 잇던 항구였다. 왕안석의 시로 나루의 이름은 문화 속에 남았지만, 강의 침식으로 지형은 크게 바뀌었고 19세기 말까지 옛 시가지 대부분이 사라졌다. 오늘날의 기념 공원과 정자, 강변은 이런 배경을 알고 보아야 한다. 온전한 옛 항구를 기대하기보다 강과 운송의 역사, 문학이 만나는 곳으로 찾아가면 좋다.
이 장소들을 하루 일정에 모두 넣을 필요는 없다. 둥관과 운하 산책은 함께 묶고 수강에는 별도의 시간을 두자. 과저우는 창장으로 나가는 작은 여행으로 생각하면 된다. 그렇게 여유를 두면 물길을 따라 들어온 물건과 생각, 그 주변에 도시를 만든 사람들이 흩어진 명소들을 이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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